"하필이면"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 읽은 말씀은 모세의 출생 스토리입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끌어내다” 혹은 “들어올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출 2:10을 보면,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에는 애굽 왕이 무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출 1:22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명령이 나갑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아들이 태어나면 모두 나일 강에 던지라는 바로의 명령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형인 아론과 세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습니다. 출 7:7절을 보면,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태어나기 3년 전만 해도,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아론은 아므람의 장자였으니까, 아론이 태어날 때 많은 사람의 축복 가운데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도 환경도 달라졌습니다. 모세는 죽어야 하는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하필이면 이때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상황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필이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혹은 “하필이면”이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필이면 내가 이런 곳에 왔을까? 하필이면 내가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을까? 하필이면 내가 이런사람들을 만났을까? 하필이면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됐을까?”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필이면 지금 병에 걸렸을까? 하필이면 지금 이런 위기가 왔을까? 하필이면 지금, 이때, 이 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밖에 또 어떤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이 언제입니까?
모세가 “하필이면” 그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하필이면”이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기적의 출발이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이 나타나는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필이면”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성경에 기록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하필이면” 딸에게 흉악한 귀신이 들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12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필이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던 예수님이 만난 여인은 “하필이면” 뜻하지 않은 혈루병에 걸려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하필이면 그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베데스다에서는 “하필이면”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던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 외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필이면”이라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경험한 것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었습니다. 기적과 능력, 은혜와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필이면”이라고 생각하면서 주저앉아 있을 때, 그들은 주님께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께 맡겼습니다. 믿고 맡긴 자들이 체험한 것이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능력과 위로였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이 되라.
모세의 출생 스토리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필이면”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만났습니다. 하필이면 죽음의 위협입니다. 그것도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린 아기입니다. 도무지 죽음의 위협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스토리를 통해서, “거듭남”의 위대한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출생 스토리를 보십시요. 모세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한 은혜를 보여주지 않습니까?
모세는 출생할 때부터 죽어야 하는데, 부모의 보살핌으로 살았습니다. 3개월이 지났을 때는 갈대 상자 안에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나일 강에 떠내려 가야 하는데, 그 어머니 요게벳이 갈대 사이에 나무 상자를 두었습니다. 물에 떠내려 가지 않게 연약한 갈대가 붙잡고 있어 주었습니다. 그걸 애굽의 공주가 보고, 물에서 건져냈습니다. 갈대 상자를 열고 보니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아버지가 죽이라고 명령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 아기를 불쌍히 여겨서 살립니다. 미리암이 바로의 딸에게 자기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가 자기 아기를 양육합니다. 그것도 바로의 딸에게 돈을 받으면서 그렇게 합니다.
모세라는 어린 아기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자기 부모를 통해서, 자기의 누이를 통해서, 애굽의 공주와 시녀를 통해서, 다 그렇게 하십니다. 이게 모세의 첫 번째 거듭남입니다. 그는 나일강에서 다시 살아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입니다. “물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 자체가 히브리 사람인 것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그런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인생이 되게 하시려고, 그를 다시 거듭나는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게 합니다. 모세가 “미드바르, 즉 광야”로 갔습니다. 그 광야에서 40년을 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40년을 보냅니다.
왜 광야가 필요한 것인지 알라.
그러면,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왜 광야가 필요한 것입니까? 은헤를 은혜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라는 엄청난 구원을 맛보았음에도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하면서, 만나를 먹게 하십니다. “아!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은헤로 사는 것이구나!” 그걸 깨닫게 하십니다. 모세도 광야 40년을 통해서 연단을 받고, 이스라엘도 광야 40년을 통해서 연단을 받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광야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먹게 하시는 것이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날마다 “이것이 무엇이냐?”입니다. 매일 양식을 먹으면서 “이것이 무엇이냐?”를 말하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구원도 은혜이고, 먹고 사는 것도 은혜이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도 은혜입니다. 광야에서 만나는 기쁨도 은혜이고, 광야에서 만나는 싸움도 은헤입니다. 거기서 사는 것도 은혜이고, 거기서 죽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광야가 천국인 것이고, 그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광야가 지옥입니다. “만나, 즉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에서는 모세, 여호수아,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출애굽 2세대들은 그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할례”를 행합니다.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훈련을 하고 체력을 기른 것이 아닙니다. 길갈에 진을 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다 맡기고 그렇게 합니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그렇게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 모든 것을 다 맡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유월절을 지키고, 가나안 정복전쟁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면서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매일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들어도 “어 이게 뭐지? 이게 뭐야?” 하나님께서 건드리시고 터치하시는 손길들이 있는데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때로는 가시와 담장으로 여러분의 앞길을 막으시기도 하는데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이러면서 전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맡기지를 못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매일의 만나를 통해서, 삶이 결국 은혜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맡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광야가 천국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광야가 천국으로 여겨지면,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을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저 세상으로 가서는 더욱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인데 두려울 일이 무엇입니까? 이런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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