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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는 기둥될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요 21:15-18)

최종 수정일: 7월 17일


[성전 꽃예술 해설: 뜨거운 고온속에서도 전도하시느라 수고하고, 애쓰시는 발 길에 축복합니다.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여기에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 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세 번 모두 ‘필레오’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의 질문은 처음과 두 번째 물음에서는 ‘아가파오’로 물으시고, 세 번째 질문에서 ‘필레오’로 물으셨습니다. ‘아가파오’는 신적인 사랑, 무조건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 ‘우정’과 같은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을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이 했던 말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에스겔이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겔 37:3)고 물었습니다. 그때 에스겔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아신다”는 말이 무슨 의미라고 했습니까? “주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면, 마른 뼈가 살아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는 것 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면, 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소망이 전혀 없 는 메마른 뼈도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대답이 그런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베드로를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고, “시몬”은 ‘흔들리는 갈대’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반석 같은 영성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마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이 시작될 때, 베드로의 마음이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요 21:14절을 보면, “이것은 예수 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 세 번째로 나타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따라가면, 처음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방문하셔서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무렵에(즉,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8일이 지나서) 다시 제자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이나 예수님이 제자들을 방문하신 뒤에, 세 번째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처음 두 번의 만남에서 베드로의 존재감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당하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그런 베드로에게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죄스러웠겠습니까? 자기를 책망하든지 용서하든지 하셔야 속이 시원할텐데, 아무런 말도 하시지 않 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러니까 ‘흔들리는 갈대, 시몬’이 된 것입니다.


요 21:1절을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 은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두 번을 만나신 후에, 세 번째로 나타나셨습니 다. 일곱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도마, 나다나엘,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두 명의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습니까? 부활의 주님 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갑자기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제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했습니다. 요 21:3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대화가 진척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중심에 있어야 할 베드로가 중심을 잡고 있지 못해서입니다. 제자들이 모여서 과거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했을 것입니다.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는 예수님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절망의 상태입니다. 에스겔이 골짜기에서 마른 뼈가 가득한 환상을 보았던 것처럼, 베드로의 마음이 메마른 상태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물고기를 잡으러 떠납니다. 그러나 그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물고기를 잡는 게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를 잡는다고 그물을 내리기는 했지만, 목적이 물고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날이 새도록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 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요 21:5-6) 예수님이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신 것은 “삶의 방향을 바꿔라”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꿔라, 자책하던 삶의 방향을 바꿔라, 절망하던 삶의 방향을 바꿔라, 낙심하고 있는 삶의 방향을 바꿔라” 이런 명령인 것입니다. 그 명령에 따라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물고기가 그 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았을 때,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겉옷을 두르고 예수님에게로 달려 왔습니다. 제자들도 물고기 잡은 그물을 수습하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을 양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떡과 생선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요 21:13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것이 “떡과 생선”입니다. “떡”이란 말이 헬라어로 ‘아르톤’인데, “떡”으로도 번역되고, “양식”으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고 할 때, “양식”으로 번역된 말이 ‘아르톤’입니다. 우리 식으로는 “떡”이고, 서양식으로는 “빵”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먹으면서, 어떤 대화가 이어졌을까요?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먹으면서 베드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생선이 ‘옵사리온’입니다. 일반적으로 물고기를 번역할 때, 헬라어 ‘익투스’를 사용합니다. 어부들이 잡아서 시장에 유통하는 생선들이 ‘익투스’입니다. 그런데 ‘옵사리온’이라고 하면, 어떤 생선이라고 했습니까? 손바닥 보다 작은 생선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상풍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이 해변에 버리거나 펼쳐 놓아서, “고아나 과부,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이 주워다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옵사리온’이 어디에 나옵니까? 요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나옵니다. 그 때 어린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이 “아르투스 크리디누스(보리떡) 다섯 개와 옵사리온 두 마리”라고 했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양식이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으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먹었던 ‘옵사리온’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먹을 때, 베드로의 마음에는 과거의 기적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먹을 양식에 대 한 소망이 없을 때,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이 소망이 되었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하나님이 뜻을 정하시면 살아납니다. 살아나서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됩니다. 그것처럼, 아무런 소망이 없 는 곳이라도, 예수님이 뜻을 정하시면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처지가 갈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는 싶은데, 자기의 범죄한 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죄악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감히 제자로서 살겠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마음이 계속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첫 마디를 들었는데, 마음이 “쿵”하고 떨어졌을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이 나의 마음을 알고 계시는구나! 내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곧바로 예수님의 질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부인하기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예수님이 “아가파스 메?”(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앞뒤를 재지도 않고 “예, 그렇습니다. 당연히 당연히 주님을 ‘아가파오’합니다. 생명을 걸고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이 겸손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라고 했습니다. “호티 필로세(즉,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에스겔이 하나님께 했던 말과 똑같은 의도입니다.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사랑도 주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든지, 하지 않든지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그렇게 생각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게 상식적으로는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생각은 그런 게 아닙니다. 베드로도 과거에는 사랑을 자 기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의 의지가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결심 했던 의지가 한 순간에 부서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한 번만 부인한 것이 아니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도 결심도 자기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 의”에 대한 자랑과 교만이 깨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이 ‘내가 주님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것’이라 면, 그 뜻대로 될 것입니다. 주님이 뜻을 정하시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그 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6)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잘 아 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님이 이미 아십니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뜻을 정해서 나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연약함을 이미 아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라는 의도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이 물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주님이 아신다”고 할 때는 헬라어 ‘오이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직관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이미 주님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알 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주님이 아신다”고 할 때는 ‘기노스코’를 사용했습니다. 경험 적으로 체험하고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직관적으로도 아시고, 경험해 보셔서도 압니다. 그 러니까 “모든 것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 주님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다 알고 계시다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주님의 뜻에 있습니다. 자신이 생명을 걸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이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함께해 주셔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자기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자기로서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주님의 뜻”을 말씀하셨습니다. 18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하셨는데, 헬라어로 ‘아멘 아멘 레고 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믿음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이루어질 일”이을 말씀하신 예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직역하면, “믿음대로, 네가 믿는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젊어서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이곳 저곳을 다녔습니다. 자기 의지와 뜻대로 살았습니다. 자기 결심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주님의 뜻대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끝은 “네 팔을 벌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케이라스’가 복수형이기 때문에, “양 팔을 벌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베드로도 십자 가에서 죽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요한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를 따르라”(요 21:19)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이끌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제자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주님의 뜻에 맡긴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지로서는 실패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사랑으로서는 실패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자기를 맡깁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를 다시 세우십니다. “어린 양을 먹이라고, 치라, 먹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전처럼 나를 따라 와라. 내가 너를 이끌어 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신앙의 핵심입니다. 맡기면 삽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힘들고, 괴롭고, 고단하고, 피곤하게 합니까? 왜 그런 것입니까? 내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려고 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 맡기면 다릅니다. 부흥의 세대가 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맡겨야 합니다. 성령님의 주권에 나를 맡기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광야를 걷더라도 생명이 되게 하십니다. 거칠고 억센 폭풍과 만나도 꺾이지 않게 하십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거친 폭풍도 넘어가고, 메마른 광야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신앙을 기둥같이 되게 하십니다. 핵심은 맡기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분량이 다릅니다. 배가 목적지로 항해를 하는데, 모두 같은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도를 봐야 하는 사람이 있고, 키를 조정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관을 작동시켜야 하는 사람이 있고, 갑판을 청소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대접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앞에 장애물이 있는 지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 각자의 일이 있습니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가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달려갈 길을 다 마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끝까지 기도로 섬겨 주시고, 달려갈 길을 힘껏 가야 하는 분들은 힘써서 가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신뢰하면서, 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을 기둥같은 성도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텃밭에서는 기둥으로 쓸 나무가 나오지 않습니다. 비바람과 폭풍을 견디게 하는 산과 들에서, 기둥같은 나무가 나오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렇게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광야를 견디면서, 비바람과 폭풍을 이겨내면서 기둥같은 성도가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주님이 뜻을 정하시면,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계신 예수님, 생명을 다 바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맡기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여러분을 때리고 욕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늘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여러분에게 능력과 소망이 되심을 기억하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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