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로 가게 하신 핵심적인 이유
이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17절을 보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입니다. 비교적 직선로에 가깝기 때문에, 이 길로 가면 4-5일 정도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빠른 길이 바로 이 길입니다. 그 외에도 내륙을 관통하는 직선로도 있었습니다. 일명 “왕의 대로”라고 불려진 길입니다. 이 두 길이 애굽과 가나안 지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무역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길로 가면, 빠르게 애굽에서 가나안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길들을 자꾸 설명하려고 합니다. 지도를 그려서 설명하고, 이 길의 장점과 단점을 설명합니다. 물론 성경 공부를 할 때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설교는 달라야 합니다. 출 13장이 전하려는 중요한 메시지는 길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편으로, 이 길로 가지 않게 하신 이유가 “전쟁에서 피하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17절에 나오는 이유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해안 길을 가게 하시지 않은 이유가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하나님이 이렇게 자비로우신 분이다”라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주목하고, 이런 표면적인 이유에 집착하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을 놓치게 됩니다. 사람들이 길을 설명하고, 길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핵심은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핵심입니다.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앞서, 17절에서 말씀하신 이유를 표면적인 이유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본질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고, 표면적인 이유를 말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이유를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본질적인 이유를 말하면, 마음이 상할까 배려해서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이가 버릇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애가 버릇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 애가 잘못됐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애가 착하기는 한데, 철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돌려서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완곡 어법”이라고 합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신 이유도 본질이 아닙니다. 200만이 넘는 사람이 애굽에서 나오는 중입니다. 이 사람들 중에, 당시 유명했던 무역로를 아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자식들이나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물어봤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가야 해요?” 아이들의 특징이 그런 것 아닙니까? 아이들하고 차를 타고 어디를 가면,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습니다. “얼마나 가야 해요? 얼마나 남았어요?” 그래서 사람들도 그런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을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끼리 가면 4-5일이면 가는 길인데, 여럿이 가니까 일주일은 거릴 거야. 보름쯤 가야 할 수도 있어. 아무리 길어도 한 달이면 넉넉히 갈거야.”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준비한 양식은 한 달 분량이었습니다. 출 16장을 보면,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달 십오일”에 먹을 양식이 떨어져서, 모세와 아론을 불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애굽 이후, 꼬박 한 달이 지나서 양식이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던 것과 다르게 그들을 인도하실 계획이었습니다. 그 계획에서 핵심은 “임재”입니다.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를 충분히 체험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라.
애굽에서 430년을 살았고, 그 중에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았습니다. 애굽에 완전히 물든 인생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 묶은 때를 벗겨내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이 하나님의 임재 체험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지내야 하는 여정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길었습니다. 출 13장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임재 의식이 임재 체험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지만, 그의 유골은 하나도 빠짐없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애굽이 요셉과 그의 후손들에게 결코 약속의 땅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요셉이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 유언에 담김 메시지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임재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엄청난 박해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2장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기 13장은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부르짖음이란 무엇이었겠습니까? 요셉의 유언입니다. 창 50:26절을 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반드시 돌보신다”와 “반드시 찾아오신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서로는 표현이 똑같습니다. ‘파코드 이프코드’라고 되어 있습니다. ‘파코드, 이프코드’가 같은 뜻의 단어입니다. 원형이 ‘파카드’인데, ‘돌본다, 열심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두 번 연속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우리 말이나 영어로 번역할 때 “반드시”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원어적으로 이해하면, “찾아오셔서 돌보신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란 “하나님, 우리를 찾아오십시요. 우리를 보살펴 주십시요.”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돌보아 주십시요. 우리의 억울함을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고통을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괴로움을 돌보아 주십시요.” 이게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하나임의 임재”를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이 지금 응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살았는데, 하나님의 임재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얼마나 감격이며,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18절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출 13:2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22절에서는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소원, 사람의 기대, 사람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만나를 주셔서 체험하게 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시내산에서는 무려 11개월 동안 머물게 하시면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짓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제자, 세상에서는 사명자가 되라.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이 하나님의 임재 체험으로 전환되는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으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소원했을 때 그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삶의 모든 환경들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제목이 “교회에서는 제자가 되고, 세상에서는 사도가 되라”입니다. 이게 뒤바뀐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세상의 사도가 되어서,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교훈을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르짖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부르짖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압도적인 임재를 체험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나가서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를 전하는 사도, 복음의 능력을 전하는 사도,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그렇게 나가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빌 4:9절에서,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시작이 압도적 임재 체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임재 의식이 압도적인 임재 체험으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예배하는 시간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도록, 의식하고, 생각하고,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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