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그 가르침에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32절을 보면,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영역은 이런 식입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입니다. “이해가 되었냐? 설득이 되었냐? 알게 되었냐?”가 아닙니다. “믿게 되었냐?”는 것이 핵심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자, 깨닫는 자, 알게 된 자”가 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어떤 사람이 믿는 자가 되고,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자가 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우선 믿지 않는 자들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마가와 눅가복음에서는 서기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맴버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유대교 공동체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맴버들은 식민지 시대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들입니다. 그 지도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면 그들이 믿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에서는 “권위”의 문제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고 했습니다. 헬라어 ‘엑수시아’는 ‘권위, 권세, 능력’이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에크’와 ‘우시아’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에크’는 ‘~로부터, ~밖으로’라는 뜻입니다. ‘우시아’는 ‘본질’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엑수시아’란 ‘본질로부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권위란 “본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종교적인 권위나 역사성의 권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시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이 25절에 나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이 질문은 권위의 본질이 무엇인냐에 대한 것입니다. “권위의 본질이 종교성인냐 역사성이냐? 어떤 학파의 스승으로부터 배워서 권위가 생기고, 전통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야 권위가 있는 것이냐?” 이런 것을 물의려는 의도입니다. 이를 통해서, 권위의 본질이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임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늘로부터”라고 하면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라고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돌로 맞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믿지 못했는지 보이십니까? 그들은 “권위”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전통, 역사적인 전통”이라는 그런 “전통의 권위”에 붙잡혀서, 믿음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전통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해하면 안 됩니다. 전통은 소중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딱 붙잡혀서, 그것이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권위라고 생각하면, 말씀보다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면 신앙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생각도 똑같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한 것은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쓰임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쓰임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쓰임받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부인)의 체험이 중요하다.
어제, 김선도 감독님 입관예식이 있었습니다. 감신대 교수로 은퇴한 서창원 교수님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가 설교하면서, “자기는 본래 부흥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부흥사가 되지 못하고 신학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김선도 감독님은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된 내면의 체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5분의 기적’이란 자서전을 보면, 6.25전쟁에서 죽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된 내적 체험이 영혼을 살리는 목회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된 내면의 체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영혼을 살리는 목회를 할 수 없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물론 겸손하게 설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상당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죽음의 내면적 체험, 자기가 죽어지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체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엄청납니다. 똑같은 성도라도 자기 죽음의 체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다릅니다.
우리가 “모태 신앙의 특징이 뭐냐?”라고 하면, “모태 신앙의 특징은 ‘못해, 못해’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태 신앙인 사람들은 뭘 말하면, 자꾸 “못해, 못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스갯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기 죽음의 체험, 자기 부인의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 부인의 체험, 자기 죽음의 체험이 없으면, 신앙도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목회를 하더라도 자기 죽음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도 자기 죽음의 체험이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탁월한 신학이론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깨져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깨지고 부서지지 않으면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보여야 산다. 보이면 따라간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보십시요. 어떤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깨지고 부서진 사람들입니다. 앞서 눅 19:47절 이하를 읽었는데, 거기를 다시 보겠습니다. 눅 19:47절과 48절을 보면,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눅 19:47-48)고 했습니다.
여기서 믿는 사람들의 특징이 나옵니다.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라고 했습니다. “귀를 기울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크-레마마이’는 ‘~로부터 매달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매달려서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왜 매달렸겠습니까? 자기가 부서지고 깨졌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붙잡고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어떤 사람들에게 보이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발견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어떤 상태로 존재해야 합니까? 깨지고 부서진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린 상태, 먼지처럼 부서진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하나님 섭리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깨져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이 보이면 따라가게 됩니다. 말씀의 끝이 보이면 좇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따라가다가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를 생각해 보십시요. 말씀이 보이니까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120년 동안 열심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얼마나 노아를 조롱했겠습니까? 당시는 하나님이 인류를 진멸하시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죄로 물들고, 세상 사람들이 악할 때라는 뜻입니다. 그 악한 사람들이 얼마나 노아를 조롱하고, 멸시하고, 비난했을까요? 그런데도 보이니까 충성스럽게 말씀이 지시하시는 바대로 순종했습니다.
말씀이 보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겠습니다. 보이니까 따라간 것입니다. 따라가니까 결국에는 열매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여야 합니다. 말씀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이 보여야 합니다. 보이면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막혔던 곳이 뚫리고, 싹이 자라나서 열매가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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