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도 차원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본다”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26절에서,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본 것입니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30절에서는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온 “보다”라는 두 개의 단어가 다릅니다. 26절에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본다고 할 때는 헬라어 ‘이돈테스’이고, 베드로가 바람을 본다고 할 때는 ‘블레포’입니다.
‘이돈테스’의 원형이 ‘에이도’인데, ‘어떤 사실을 확인할 때’ 사용됩니다. 즉, 뭔가를 보고 난 뒤에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에이도’라고 합니다. 여기 컵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 이게 컵이구나!”라고 외형을 확인하는 것이 ‘에이도’입니다. 헤롯이라는 이름이 ‘헤로스’와 ‘에이도스’의 합성어입니다. ‘헤로스’는 ‘영웅’이란 뜻이고, ‘에이도스’는 ‘외형, 모습’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이란 이름의 뜻이 ‘영웅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의 외형은 영웅적인 모습이었지만, 속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살았습니다.
그와 다르게, ‘블레포’는 보기는 하는데, 중심을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거지 맹인 바디매오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을 때, ‘아나 블레포’라고 했습니다. “위를 보기 원합니다. 중심을 보기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블레포’라고 하면, ‘나를 압도하는 주체’로 보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보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잘못된 것을 바라보게 한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구원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31절,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왜 마음이 둘로 나위어졌느냐는 것입니다. 왜 시선이 둘로 나뉘어져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시선이 이중적이라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중적인 시선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제대로 꽂혀 있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보니까 주님을 향해서는 ‘에이도’입니다. 그런데 바람을 향해서는 ‘블레포‘입니다.
확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이 이미 답을 얻으셨습니까? 제자들이 주님을 향해서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는지 보십시오. 사실을 확인하는 ‘에이도’입니다. 외적인 실체를 확인하려는 시선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거친 바람을 향해서는 ‘블레포’입니다. 나를 압도하고,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세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믿음없는 마음이라는 것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향해서는 자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지면 이러면 안 되는데, 주님이라고 별 수 없으신데”라고 합니다. 반면에 세상에 대해서는 “아~ 이토록 거친 바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풍조, 이 세상의 시련, 이 세상의 논리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의심, 즉 이중의 눈을 가진 베드로라는 것입니다. 이게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자여”라고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에이도’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현실을 알고 파악하는 눈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현실이 얼마나 크고 작은지를 객관화해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향해서는 ‘블레포’로 나가야 합니다. “이 모든 현실을 압도할 수 있는 분이 주님이시다. 나를 압도하는 권세, 세상을 압도하는 권세, 시련과 환난과 질병도 압도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늦었다고 생각된다고 해도 믿음으로 가라.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없는 인생을 살 때가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 없이 살 때가 있고,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생각과 고집을 앞세울 때가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인되시는 자리를 빼앗아 버릴 때가 있다. 많은 분들이 베드로와 같은 이중의 눈으로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은 성경에 나온 것이지 현실이 아니야”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블레포'하면서, 성경을 ‘에이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블레포’해야 합니다. 주님이 권세자이신 것을 믿고, 세상과 바람을 압도하시는 분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 분의 손에 붙잡히니까 구원받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연합되니까 풍랑이 그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붙잡히기만 하면, 세상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제대로 붙잡히지 않아서 문제이지, 붙잡히면 달라집니다.
여러분의 시선이 주님을 향해서는 ‘에이도’이고, 세상을 향해서는 ‘블레포’이기 때문에 세상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바뀌면 세상을 압도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여러분을 넘어뜨리려고 거친 바람을 내도, 주님에 의해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이 주님을 향해서, 베드로처럼 구원의 소리를 외칠 수 있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 이게 두 번째 메시지입니다. 은혜받는 길은 단순합니다.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믿고, 구하면 됩니다. 여러분, 무엇이 문제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시련과 환난이 문제입니까? 질병과 가난이 문제입니까? 불화가 문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고 구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늦었다고 생각하면 늦은 것이다, 그래도 믿음으로 가라”입니다. 여러분, 늦었다고 생각하면 늦은 것이 맞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풍랑에 지쳐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에 주님께 붙잡힌 자가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늦은 것이 맞습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가십시요. 주님께 구원해 달라고 외치십시요.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요.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고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의 은혜와 기적같은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되고 신령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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