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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롬 3:1-9)

최종 수정일: 8월 13일


 


[성전 꽃예술 해설: 저희가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게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고 간절한 기도제목들이 주님의 뜻 안에서 응답받는 기쁜 한 주 되게하소서]

복음이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단순하게 말하면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좋다’는 뜻의 ‘유’와 ‘소식’이란 뜻의 ‘앙겔리온’이 합쳐진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어 로 말하면, ‘Good News’가 됩니다. ‘복된 소식, 좋은 소식’이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종교적인 용 어가 아니라, 전령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을 말하는 단어였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전령들을 통해서 “좋은 소식”(즉, 승리의 소식)을 전할 때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간단하게 말하기 위해서” 사용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죄와 사망에서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고, 그 분이 주시는 영생에 초대를 받았다. 그분의 평강과 은혜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님은 누구시며,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하신 일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복음의 핵심을 요 3:16절이라고 합니다. 요 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주제는 분명합니다. 요일 4:16절에서 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 롬 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여기까지 가야 합니 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남긴 메시지로 인해서 수많은 성도들이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을 요약하는 “한 마디”가 되면 안 됩니다. 요 3:16절이 전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것으로 끝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까? 바울은 고전 3: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 성전에서 누가 머리라고 했습니까? 고전 12: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몸의 지체들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엡 4:15절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골 1:18절에서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머리가 되시고, 나는 예수님의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머리가 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요약한 책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끝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데 선수입니다. 아담이 타락하고 범죄한 이유도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창 2: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고, 에덴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청지기 이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모든 열매를 임의로 먹을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가 은혜를 잊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이 선악과입니다.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에 대한 권한을 주셨는데, 동산 중앙은 금지하신 것입니다. 중앙을 침범하면 안 됩니다. 중앙을 훼손하면 안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까? 중앙을 바라볼 때마다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이다”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중앙을 침범했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려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것을 침범했습니다. 그렇게 인류가 범죄한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로 맡겨 주신 것인데, 은혜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3장도 보십시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말씀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네 가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실제로 제기했는지 모르지만,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야기할만한 네 가지 반론에 답을 합니다. 왜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반론을 말하냐면, 앞서 바울이 유대인들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 가지 반론을 말하는데, 첫 번째로 하는 말이 1절입니다. 롬 3:1절에서,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할례를 행한 유대인이라고 해도, 율법을 범하면 무할례가 된다”고 했습니다. 즉, 할례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받은 할례가 아무런 유익이 없다면, 이방인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반론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할례라는 증표로 “일종의 특권”을 주셨는데,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9:4절과 5절 에서 유대인의 특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 특권들 중에서, 가장 으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롬 3:2절을 보면,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선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은 ‘으뜸가는, 가장 중요한 것은’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유익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 특권들이 주어졌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 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위대하거나 진실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맡기신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충성스럽게 다스려야 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맡겨주신 말씀을 잘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도 못했습니다. 맡겨 주신 말씀에 따라서 살지 않고, 세속에 물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맡겨 주셨는데, 그들은 맡겨진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책망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성경의 주제라면, 심판과 저주가 나올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참된 주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그 사랑을 끌어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 변화란 내가 주인으로 살던 인생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교통 표지판에 “유턴”을 보고 돌아서는 것과 같습 니다. 어떻게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까? 주인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었던 삶에서, 예수 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어떤 행동의 결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거나 살 인을 하거나 교통법규를 어기거나 하는 행위의 결과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행동이 아닙니다.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멀어진 상태라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 음에서 몰아내고, 내가 주인된 상태로 있는 것이 죄입니다. J.D 그리어는 자기 자녀들에게 “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로 “자주 죄에 대해서 설명한다”고 했습니 다. 영어로 “S, I, N”(=sin)을 “죄”라고 합니다. 여기서 J.D 그리어는 “I”가 중심에 있는 것을 보라고 합 니다. “죄란 무엇인가? ‘I’가 중심에 있는 것이 죄라는 것(Something과 Nothing 사이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나를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것이 죄다. 이것은 바로 ‘나’의 문제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아담이 에덴 동산의 중심에 자기를 놓은 것이 타락의 출발입니다. 그가 동 산 중앙에 자기를 놓으려고 시도한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결국 동산 밖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중심이 되었던 태도를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회개로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 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두 번째 반론에 대해서 답변한 것을 보십시요. 유대인들의 두 번째 반론이 3절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주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약속 을 폐기하고 심판하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요.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심판 가운 데 떨어져서 하나님께 반박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만 참되시다”(롬 3:4)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되시다”고 할때 사용된 헬라어 ‘알레테 스’는 ‘진리’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모두 거짓된 존재(즉, 죄악된 존재)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되 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려고 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성은 결국 인생을 ‘거짓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전도서 표현에 따르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이 되 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전 2:11절에 따르면,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 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롬 3:9절에서,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 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 아래에 있다, 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받아도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들 이 상처를 쉽게 받고,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죄와 병렬적인 관계(수평적인 관계)에 있어서, 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의 위에 있어서,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으로서는 안 됩니다. 우리로서는 다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도 롬 7:22절 이하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만 선과 악이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서도 선과 악이 계속해서 싸운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되라고 그렇게 싸우는 것이겠습니까? “자아가 주인되라”고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결국, 누가 주인되느냐의 싸움입니다. 아담은 그 싸움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를 처음 시작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 1:1)이라고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둘로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그리스도 예수님의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영접 한 사람은 이렇게 자기 정체성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게 본질입니다.

 

여러분이 없어도 그리스도는 존재하실 수 있지만, 그리스도 없이 여러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러 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의 존재 뿌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뿌리(근원)되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결되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뿌리와 떨어지면 말라 비틀어져서 죽게 됩니다. 모든 만물이 존재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뿌리와 연결되지 않은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 만 영은 죽은 상태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도 가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 생활이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신령과 진심으로 드리지 못합니다.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이 보이지 않기 때문 에,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복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 번도 전하지 못하는 영적인 벙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의 뿌리에 연결되어 있으면 보기에 어떻게 보인다 할지라도 산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는데, 어떤 상태로 연합되라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된 상태로 연합되 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라면 내가 나를 통해서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망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인되시면, 주인이신 주님을 통해서 판단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주인되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인에게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별개로 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연합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 님이 다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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