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긍지와 믿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렀다고 지적하면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롬 2:11)”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얼굴을 보고 판단 하고, 옷을 보고 판단합니다. 직업으로 판단하고, 신분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이유가 12절에 나옵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선,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이라도 율법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 분이 교통법규를 잘 모르는 분이라고 해도, 교통법규를 어기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법의 원리이지 않습니까? 법을 몰라도 지키지 않고 어기면, 처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으로 “율법을 알면서 범죄한 사람은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나 아는 사람이나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취지로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알더라도 율법을 다 지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 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을 듣는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말씀을 듣는다고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자꾸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자들 중에도 이 말씀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오해하는지 아십니까?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율법을 행해서 의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행(함으로)해서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입니다. 율법을 행해야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지만,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행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행해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 앞 에서 율법을 다 행할 수 있겠냐?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다 하나님 앞에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한계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 좋은 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드러낼 뿐입니다. 그것으로는 그 사람의 죄가 용서될 수도 없고, 그 죄에서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롬 2:11절에서 말한대로,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범죄자가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고 법정에 서더라도, 그는 죄인일 뿐입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그는 죄인일 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진실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죄를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죄를 넘어가게 하시는 구주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 그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의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죄인이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은 “마음을 돌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자기의 소유나 열심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 이 외모를 취하시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란 죽음 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완전히 죽어져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아가 완 전히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구주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자아가 되어야 합니 다. 구주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자아가 되어야 합니다. 앤드류 머레이가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는 책에 기록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엔 드류 머레이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열망하며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왜 자꾸 실패합니까?”라고 종종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는 “당신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합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엔드류 머레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의지했다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 을 의지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엔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모든 실패의 원인은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저주받 은 자아를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자아)를 부인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셔야 한 다. 예수님이 당신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셔야 한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을 드렸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당신의 머리, 즉 온갖 생각으로 가득한 당신의 머리도 드려야 한다... 당신의 능력 으로는 당신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으니 주께 나아가라. 주님이 당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 게 하라.”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긍정이란, 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부정하는 것 입니다. 나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다 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긍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절대 긍정입니다. 하나님으로서는 다 된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는 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런 믿음이 자기의 열심으로 도달되지 않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받아야 합니다. 29절을 다시 보십시요.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엔 프뉴마티 우 그람마티’라고 했는데, 이 말은 ‘by the 성령, not by the 문자’란 뜻입니다. “그람마티”가 ‘필사, 문자’란 말입니다. “마음에 받는 할례”는 필사된 율법에 따라서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기를 부인할 때, 성령이 임하셔 서 “그의 주인”이 되십니다. 주인되신 성령에 의해서, 마음이 죽어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다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신앙은 말씀을 절대 긍정으로 받아들이 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가야 합니다. 말씀이 절대 긍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러면 순종이 따라붙게 됩니다. 그때 순종하는 믿음에, 하나님이 경험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 생활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경험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돌아 보십시요. 돌이켜 보면, 항상 “말씀에 순종하는 때”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불순종으로 나갈 때는 아무 리 기도하고, 헌신하고, 봉사해도 별로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 응답을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하고” 하셨을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란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 되시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고, 나의 진리이고, 나의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드린 사람에게 다툼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드린 사람에게 주장이 있겠습니까? 자기를 드린 사람에게 원망이나 불평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드린 사람에게는 순종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바로 그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믿음의 역사를 보게 하고, 기도와 간구의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29절 마지막 대목을 보면,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칭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칭찬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에파이노스’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찬송”이란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찬송”, 즉 노래가 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에파이노스’는 본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뜻한 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확대해서 해석하면,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뜻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말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이런 역사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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