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6절을 보면,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라고 했다. 창세기를 한 구절로 정리했다. 그리고 7절로 이어지는데,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는 말씀이다. 요셉과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매우 강해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번성하는 생명의 역사를 이야기 했다. 죽음으로 끝나는 역사가 아니라, 더 풍성한 생명의 역사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은 죽음이 아니라, 번성하는 생명의 역사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야곱의 남겨진 아들들의 이름을 통해서 이어져 간다. 이제, 야곱이 남긴 아들들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새겨져 나가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 이름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이루어가려고 하신다.
1. 이름에 담겨진 약속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은 바로의 집과 하나님의 집이 싸우는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재물과 힘으로 자기의 집을 세우려고 하는 바로의 집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하나님의 집이 싸우는 영적 전쟁터라는 말씀이다. 마귀의 권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싸우는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자기의 집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공격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번성해지지 못하도록 박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박해를 당한다고 하나님의 집이 무너져 내릴까? 세상의 엄청난 박해와 압제에도 하나님의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더욱 많아져서 하나님 나라의 지경이 넓어지고 확장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집을 박해하던 바로의 집이 심판을 받는 것처럼, 이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마침내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이 이루어져 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미 야곱의 열두 아들들의 이름에 넣어 놓으셨다.(2020. 2.9일 설교영상 참고)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풀어서 설명하신 것이 아세레트 핫데바림의 서론에 해당하는 출 19장에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나? “너희를 나의 소유가 되게 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고,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불러내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고, 그 분과 연합을 이루고, 그 분을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로 세상과 싸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나라의 지경을 넓혀 가시는 것이다.
2. 주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에 언약을 담으신 분이 누구이시겠나?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누구의 이름이 그 약속을 이끌어 가시는가? 하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을 이끌어 가신다. 그들에게 때로는 “치료의 하나님”(여호와 라파)으로, 때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으로, 때로는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으로”(여호와 이레), 때로는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여호와 로이)로, 때로는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여호와 샬롬)으로, 때로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여호와 삼마), 때로는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여호와 닛시)”로 이끌어 가시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이름들에는 능력이 있다. 그것도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아주 실제적인 능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도 능력이 있다.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고 했습니다. ‘부르다’ 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에피칼레오마이’인데, ‘도움을 구하다, 경배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믿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것, 주님을 경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도움을 구하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중에 성전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만난다. 성경은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행 3:5)이라고 했다.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질적인 무엇인가를 구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가지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구분했다. 그들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서 구걸하던 사람에게 말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6)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했다. 그러자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었다.
3. 지성소에서 주님과 만나기를 사모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알기 원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 130:5절을 보면,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자기의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말씀을 바란다고 했다. 그는 여호와 앞에 서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 듣는 것을 그토록 기다린다고 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냐면, 시 130:6절에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라고 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말씀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바르’이다. 그런데 이 ‘다바르’ 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디바르’라는 단어이다. 다바르도 자음만 보면 영어로 알파벳 ‘DBR’이고, 디바르도 ‘DBR’이다. 그런데 다바르는 ‘말씀’이란 뜻이고, 디바르는 ‘지성소’란 뜻이다. 뭔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지 않으시나? 시 130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였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서기를 고대했다. 그런데 시인은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디바르”(즉 지성소)에서 듣기를 원했다. 성전에 올라가는 이유가 무엇이었나? 재물의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식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런 것이 일차원적인 목적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가장 잘 들을 수 있는 영적인 자리,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신앙의 지성소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고, 더 깊이 누리고 싶다는 영적인 갈망이 시인의 기다림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 130:7절에서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고 했다.
“복을 바라라. 재물을 바라라. 명예를 바라라”가 아니다. 성전에 가는 것은 오직 여호와를 바라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바라는 자에게 풍성한 속량을 주신다고 했다. 풍성한 구속과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 신앙의 목적인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주님 자체를 누리는 것이다. 주님을 누릴 수 있을 때, 그 안에 풍성함이 있는 것이다. 주님을 누릴 수 있을 때, 풍성한 축복이 따라 나온다는 말씀이다.
여러분은 매 주일마다 성전으로 오고 계시다. 무엇을 바라보고 계신가? “주님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주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더 깊은 말씀을 누리길 바라는도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기다리라. 내 영혼아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라.” 이런 믿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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