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3절, 6절, 8절”에 ‘로기조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3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때 “그것이...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는 말이 ‘엘로기스데’인데, 원형이 ‘로기조마이’입니다. 6절에서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기심”이 ‘로기제타이’이고, 원형이 ‘로기조마이’입니다. 8절에서는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인정한다”는 말을 ‘로기세타이’로 사용했는데, 원형이 ‘로기조마이’입니다. 이렇게 “로기조마이”를 세 번이나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신득의”(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관계”입니다. 누구와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이 사람이고, 그 다음이 동식물이고, 그 다음이 재물입니다. 이것이 성 어거스틴이 말한 “사랑의 질서”입니다(The Order of Love).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데, 누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요.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 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즉, 자기의 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여전히 죄인이었고, “죄를 다 갚았다”고 할 수 있는 행위를 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어떤 행위를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기의 죄 값을 다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죄의 무게가 무겁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영원한 불행”입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 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죄가 가려졌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에피칼륍토’입니다. ‘아포칼륍토’라고 하면, ‘드러내다, 계시 하다’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반대로 ‘에피칼륍토’라고 하면, ‘가린다, 덮는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가리셨다, 죄를 덮으셨다”는 것입니다.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죄를 보지 않으시 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매들린이라는 여자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아기였을 때부터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녀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조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항상 웃으면서 딸의 손을 잡고 춤을 추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딸이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남자 친구와 가출을 했습니다. 그렇게 인생이 꼬였습니다. 결국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노숙자 시설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가출 후에 처음으로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잘 자라며 입 맞춰 주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생활고 때문에, 클럽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매들린이 할 줄 아는 게 춤추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뜯을 수도 없었습니다. 편지를 읽어봐야 괴로울 거라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읽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계속해서 배달되었지만, 그녀는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며칠 앞두고 다시 편지가 한 통이 왔습니다. 모양도 같았고 색깔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탈의실 탁자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체구가 큰 남자가 와서는 이 편지를 너한테 전해 달라고 하더라. 받아 보면 알거라던데.” 춤추는 애들 중 한명이 전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여기 왔었어?” 매들린은 불안하게 물었습니다. 편지를 전한 여자가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나 봐.” 매들린은 봉투를 열고 카드를 꺼냈습니다. 카드엔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네가 여기 있는 것, 알고 있다. 네가 뭘 하는지도 안다. 하지만 아빠 마음은 변함이 없단다. 여태까지 편지마다 썼던 말, 지금도 그대로란다.” 그 편지를 읽고, 매들린은 하나도 읽지 않았던 앞의 편지들을 찾아서 읽었습니다. 편지마다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똑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순식간에 마루 바닥은 종이로 지저분해졌고, 매들린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졌습니다. 그녀는 바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조는 부엌에서 나와 멈춰섰습니다. 매들린의 한 손에는 가방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카드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좋아요 아빠. 아빠의 초청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받아들이겠어요” 조는 가까스로 침을 삼키며 대답했습니다. “유효하고 말고, 초청은 유효해.” 그렇게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춤을 추었습니다. 그녀가 들고 있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다시 아빠랑 춤추지 않을래?”
매들린의 잘못이나 죄악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그녀와 과거를 보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녀를 그저 자기의 딸로만 인정하고 바라보기로 한 것입니다. “에피칼륍토”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보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충실한 신하였던 우리야를 간접 살인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라고 했습니다. 그런 죄인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죄를 가려주셨습니다. 덮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보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노력과 열심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에피칼륍토’(즉, 그냥 덮어주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까?
자기를 주장하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죄와 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범죄자가 있는데, 그가 자꾸 자기를 주장한 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자기는 죄가 없다고 자기를 주장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주장하고, 자기의 뜻을 주장하고, 자기의 인생을 주장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러면 재판관이 그에게 어떤 판결을 내립니까? “범죄 행위에 대한 반성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형을 선언한다.”고 합니다. 이와 똑같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을 주장하는 것입니 다. 그래서 자기가 부인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자기의 감정을 부인해야 합니까? 왜 자기의 의지를 부인해야 합니까? 왜 자기의 즐거움을 부인해야 합니까? 왜 자기의 생명을 부인해야 합니까? 자기 안에는 “죄와 사망”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주장할수록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이 주장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흔적들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 A. 토레이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잃어야만 한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내던질 때 하나 님의 생명은 우리를 충만하게 채울 것이다. 나 자신이 무엇인가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한 예수님 자 신은 모든 것이 되실 수 없다. 나의 생명을 쫓아버려야 한다. 그때 예수님의 성령이 흘러넘칠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결국 “자기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구주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게 좋은 것입니다. 나로서는 안 되는 모든 것을 주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힘겨운 일입니다. 내가 좋아하던 쾌락과 즐거움과 만족을 끊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모든 것으로 삼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고,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고, 만족이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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