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누구인가?
본문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의 출발인데, 메시지의 핵심은 “누가 주인이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면서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유대인들이 정해놓은 법을 위반한 행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시비한 것은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한 “법규(할라카)”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것으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왜 안식일을 범한 것이냐?”고 따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다윗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안식일 특별법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의 이야기
먼저 다윗의 이야기를 보면, 4절에서 다윗이 진설병을 먹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진설병은 말 그대로 성전에 진설하는 떡입니다. 이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놉”이라는 곳으로 도망갔을 때,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지만, 아히멜렉 제사장이 특별한 의미로 다윗을 인정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도피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울과의 거룩한 전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여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을 향해서, 일종의 특별법처럼 율법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히멜렉 제사장이 율법의 형식보다 율법의 정신, 즉 핵심에 주목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마 12:7절에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자비가 충돌했을 때, 하나님께서 자비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더 확장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제가 안식일 특별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이 말씀을 하기 위한 서론과 같습니다.
안식일 특별법(예외법)
5절을 보면,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고 하셨습니다. 트리니티 공부하면서 다루었던 내용이니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보통의 일반법으로는 안식일을 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예외법”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성전을 섬기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별법은 현대 사회에도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운전을 하다가 신호를 위반하거나 법규를 어기면 어김없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교통법규를 어겨도 처벌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이 난 곳을 신속하게 가기 위한 소방차나 위급한 환자를 수송하는 구급차는 법규를 초월합니다. 때로는 신호를 위반하고 차선을 위반하기도 합니다. 범죄자를 추격하는 경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차들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일반적인 법규를 초월합니다. 이것이 “예외법, 특별법”입니다. 제사장들이 이런 “예외법”의 대상자였습니다.
제사장이 성전 안에 있으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이 성전보다 더 크신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특별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 있는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이 안식일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것처럼, 제자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메시지의 핵심으로 조금씩 나가고 계십니다.
마 12:27절을 다시 보십시요. 예수님께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앞서 잠깐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서론에 해당합니다. 핵심은 안식일과 관련한 메시지에 이 말씀이 나온 것입니다. 민 28장을 보면, 주중에는 숫양 두 마리를 상번제로 드렸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한 마리씩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렸습니다. 소제는 1/10에바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두 배로 드렸습니다. 안식일에는 숫양을 두 마리씩 드리고, 소제는 2/10에바를 드렸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안식일에 더 정성껏 상번제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형식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형식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면, 그 중심이 어떠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인되심을 인정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인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핵심과 본질을 놓쳤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그것을 놓쳤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들의 주인되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로 나간 것이 그들의 잘못입니다. 그 핵심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씀이 “주인”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엄청난 말씀이 나가고 있습니다. 누가 주인이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일이나 말이 다 무엇이라는 뜻입니까? “복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이삭을 잘라서 먹은 것이 무엇이냐? 이삭을 잘라서 손해를 입힌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안식일을 복 주신 것이며, 곡식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일이고,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주일에 우리가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복을 받게 하시고, 더 완성된 인생이 되게 하시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손 마른 사람을 “회복”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복을 주셔서, 불완전한 사람을 완전하게 해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안식일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보여야 합니다.
어떻게를 묻고 도전하라.
오늘 설교 제목이 “왜 라고 묻지 말고, ‘어떻게’를 묻고 도전하라”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보니까,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질문이 “왜”라는 것과 “어떻게”라는 것으로 나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왜”를 자꾸 묻습니다. “왜 그런데? 왜 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갑니다. 그러면 답이 없습니다. “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하는데? 왜 기도회를 하고, 부흥회를 하고, 전도를 하고, 귀찮게 하는데?” 이렇게 나가면 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를 자꾸 묻습니다. 이게 다른 것입니다. 전도를 하려고 하면,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왜 전도를 합니까? 왜 내가 합니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다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왜 내가 합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무엇을 하면 됩니까?”를 묻습니다. 그래서 사명으로 흘러가는 인생이 되고, 능력을 체험하는 신앙이 되고, 완전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란 예수님이 주인이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인생에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아십니까? 주님이 복 주시는 것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성령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믿음과 삶이 완성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져서 복되고 신령하게 하셔서 그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지금 어떤 상황이냐, 어떤 인생이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인되신다는 것을 인정하면, 모든 것은 주님이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회복이든 치유든 능력이든 기적이든, 주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인에게로 들어가십시요. 여러분의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보십시요. 그러면, 인생이 달라지고, 신앙이 달라지고, 가문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달라지는 민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의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복된 신앙과 삶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