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목격한 여인들의 반응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 되었습니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을 찾았는데, 큰 지진이 나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했습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 두려워 떨면서, 마치 죽은 시체처럼 꼼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5절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여자들의 반응을 보십시요. 8절에서,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을 가지고 있어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기쁨입니다. 우리 말로도 “무서움과 큰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무서움은 “그냥 무서움”이라고 했는데, “기쁨” 앞에는 ‘크다’는 수식어가 붙어서 “큰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원어로도 ‘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갈로스’가 “기쁨”(카라스)이라는 단어만 수식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서움을 덮을 만큼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을 기쁨으로 충만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처음 느껴보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 떨리는 기쁨, 감당하기에 벅찬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가지고 “빠르게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알렸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자들이 달려나간 뒤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반응만을 보여줍니다. 그게 16절 이하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열 한 명의 제자가 모두 예수님을 만나서 경배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경배하는 자들이나 의심하는 자들이 다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 갈릴리, 예수님께서 지신하신 산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마태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확실하게 이행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확신있게 증거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경배하는 사람이나 의심하는 사람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다 모였습니다.
확신과 의심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런데 뒤에 보면, 이 여인들과 다른 반응을 가진 사람들이 나옵니다. 11절을 보면, 무덤에 같이 있던 경비병 중에 몇 명도 성에 들어가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알렸다고 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성으로 들어가서 본 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보고를 받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모여서 의논을 합니다. 그리고는 군인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본 것을 확신있게 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군인들도 부활의 현상을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천사가 돌을 굴리고, 무덤이 열려진 현상을 보고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상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진실을 왜곡하려고 하는데, 그 일에 앞장서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자들이 확신있는 길을 간 이유는 무엇이고, 경비병들이 의심의 길을 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단 하나의 차이입니다. 9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경비병들도 똑같이 부활의 현상을 보았지만, 부활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평안하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의 무서움과 큰 기쁨이 무엇으로 바뀝니까? 무서움과 큰 기쁨을 가지고 달리던 걸음이 “경배”로 바뀝니다.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발을 붙잡으려면 엎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릎을 꿇고 엎드려 경배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그들의 감정이 엎드려 경배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그렇게 됩니다. 엎드려 예배하게 됩니다. 엎드려 경배하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패턴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의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무서움과 큰 기쁨”이 있습니다. 이때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감정으로 신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만나야 엎드려 경배가 됩니다. 부활이 만남으로 이어져야 하고, 만남 속에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확신이 됩니다. 그 뒤에, 확신이 된 말씀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만남이 있을 때, 믿음이 선포가 된다.
이게 확신있는 길을 가게 된 이유입니다.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만남이란 곧 목격입니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만나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계신 주님을 목격한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증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투스’는 ‘증인’이란 뜻 말고도 ‘순교자’란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증인이란 곧 순교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편안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순교”를 생각하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늘 죽음을 경험합니다. 자아의 죽음, 자존심의 죽음, 이성의 죽음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인”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목격자들을 말합니다. 법정에서 어떤 사람이 증인으로 세워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 사람이 하는 “증언”이 효력을 가지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목격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증인으로 세워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식과 권력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졌고, 얼마나 힘이 세고 건강한 사람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증인으로서 법정에서 효력을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목격했느냐, 아니냐”라는 사실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확신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목격자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목격한 사람, 체험한 사람은 확신의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성도란 말씀을 목격한 자, 즉 말씀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기도를 목격한 자, 즉 기도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응답받는 체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한 사람은 예배의 감격 속에서 삽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한 사람은 담대하게 믿음으로 삽니다. 기도를 통해서 말씀을 목격한 사람은 말씀에 붙잡힌 인생, 언약에 붙잡힌 인생을 삽니다. 그러니까 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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